자사주 매입의 정치경제학: 금융화가 글로벌 제조업 경쟁력과 혁신 역량에 미친 파괴적 영향

자사주 매입의 정치경제학: 금융화가 글로벌 제조업 경쟁력과 혁신 역량에 미친 파괴적 영향

1. 서론: 금융화와 제조업의 구조적 위기

지난 40여 년간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은 실물 경제의 성장을 지원하던 금융의 역할이 역전되어, 기업의 의사결정과 자원 배분이 금융 시장의 단기적 요구에 종속되는 현상, 즉 ’기업의 금융화(Financialization)’라는 근본적인 변혁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도구로 부상한 것이 바로 ’자사주 매입(Stock Buybacks)’이다. 자사주 매입은 표면적으로는 기업의 잉여 현금을 주주에게 환원하여 자본 효율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포장되지만,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기업의 장기적인 혁신 역량과 생산 기반을 훼손하고 경영진과 주주 간의 이해관계를 단기적 주가 부양에 고착시키는 기제로 작동해왔다.

본 보고서는 윌리엄 라조닉(William Lazonick) 교수가 제시한 “보유 후 재투자(Retain and Reinvest)” 모델에서 “감원 후 분배(Downsize and Distribute)” 모델로의 전환 이론을 핵심 분석 프레임워크로 삼는다. 20세기 중반, 기업은 이익을 유보하여 설비와 인력에 재투자함으로써 혁신을 주도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주주 가치 극대화(Shareholder Value Maximization)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기업은 인력을 감축하고 R&D 투자를 줄여 확보한 현금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해 주주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본 연구는 자사주 매입이 어떻게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초래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이 어떻게 유럽(독일, 영국), 아시아(일본, 한국, 중국, 홍콩)로 확산되며 각국의 산업 생태계를 위협하거나 변형시키고 있는지를 심층 분석한다. 특히 각국 대표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자사주 매입이 R&D 투자 축소, 공정 혁신 지체, 그리고 궁극적인 제조업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한다.

2. 미국의 사례: 금융화의 기원과 제조업 공동화의 가속화

미국은 자사주 매입이 기업 경영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은 진원지이자, 그로 인한 제조업 붕괴의 폐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단순히 인건비 상승이나 후발 주자의 추격 때문만이 아니라, 기업 내부의 자원 배분 시스템이 금융 논리에 의해 잠식당한 결과임을 데이터는 증명한다.

2.1 SEC 규정 10b-18과 ’약탈 면허’의 탄생

1982년 이전, 미국에서 자사주 매입은 주가 조작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1934년 증권거래법은 주가 조작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2년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규정 10b-18(Rule 10b-18)**을 도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 규정은 기업이 특정 조건(하루 평균 거래량의 25% 미만, 단일 브로커 이용 등)을 준수할 경우 주가 조작 혐의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는 ’세이프 하버(Safe Harbor)’를 제공했다.1

이 규정의 도입은 사실상 기업들에게 주가 관리를 위한 자사주 매입을 합법적으로 허용한 조치였으며, 라조닉 교수는 이를 “약탈 면허(license to loot)“라고 비판했다.3 이 규정 도입 이후 미국 기업들은 이익의 대부분을 설비 투자나 임금 인상 대신 자사주 매입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S&P 500 기업들은 총 6조 3천억 달러(약 8,400조 원)를 자사주 매입에 지출했다. 배당금까지 합치면 이 기간 동안 기업 순이익의 거의 100%가 주주에게 환원되었다. 이는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미래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모두 소진했음을 의미한다.5

연도S&P 500 자사주 매입 규모 ($ Billions)배당금 규모 ($ Billions)순이익 대비 주주환원율 (%)
201239928282%
201455335096%
2016536397105%
2018806456106%
202188251193%

데이터 재구성: 4

경영진의 보상 체계가 스톡옵션 등 주가 연동형으로 재편되면서, 경영진은 자사주 매입을 통해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인위적으로 부풀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성과급을 극대화하려는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되었다. 이는 기업의 장기적 생존보다 경영진의 단기적 부 축적을 우선시하는 도덕적 해이를 구조화했다.7

2.2 보잉(Boeing): 엔지니어링의 실종과 737 MAX의 비극

보잉의 사례는 자사주 매입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링 기업을 기술적, 도덕적 파산의 위기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이고 강력한 증거다.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와의 합병 이후, 보잉의 경영 철학은 ’엔지니어링 중심’에서 ’재무 성과 중심’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2013년부터 2019년 사이, 보잉은 무려 430억 달러(약 57조 원) 이상을 자사주 매입에 쏟아부었다. 이는 같은 기간 보잉이 벌어들인 순이익을 상회하는 규모였으며, 787 드림라이너나 차세대 기체(777X)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훨씬 넘어서는 금액이었다.9 이 막대한 자금이 주주 환원에 쓰이는 동안, 보잉은 차세대 항공기 개발을 위한 근본적인 R&D 투자를 소홀히 했다.

수십억 달러가 소요되는 새로운 기체를 설계하는 대신, 보잉 경영진은 단기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1960년대에 설계된 737 기체에 더 큰 엔진을 장착하는 저렴한 해결책(737 MAX)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기체의 공기역학적 불안정성이 발생했고, 이를 기체 재설계가 아닌 저렴한 소프트웨어(MCAS)로 땜질하려 했다. 심지어 비용 절감을 위해 조종사 훈련 요건을 완화하고 안전 장치를 옵션으로 판매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12 그 결과는 346명의 목숨을 앗아간 두 차례의 추락 사고였다.

자사주 매입으로 주가를 부양해 데니스 뮬렌버그 등 경영진은 막대한 스톡옵션 차익을 챙겼지만, 그 대가는 수백 명의 인명 피해와 보잉이라는 제조 거인의 붕괴 위기였다. 2019년 이후 보잉의 현금 흐름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품질 관리 문제와 생산 지연은 2024-2025년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보잉은 이제 현금이 부족하여 자사주 매입은커녕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을 확충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는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진 자본 배분의 왜곡이 실제로는 기업의 존립 기반인 안전과 기술력을 파괴했음을 증명한다.13

2.3 인텔(Intel): 기술 리더십 상실과 재무공학의 덫

반도체 제국 인텔의 몰락 또한 금융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텔은 2000년대 중반부터 ’카피 정확히(Copy Exactly)’라는 기술 중심 전략보다 재무 지표 관리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인텔은 R&D에 840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같은 기간 자사주 매입에는 그보다 많은 880억 달러를 지출했다. 기술 기업이 기술 개발보다 주가 관리에 더 많은 돈을 쓴 것이다.

2012년부터 2022년 사이의 데이터는 더욱 충격적이다. 인텔은 경쟁사인 TSMC나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정에 사활을 건 투자를 집행할 때, 잉여 현금을 자사주 매입에 할당했다. 2018년부터 2022년 사이 미국 제조업 전반의 R&D 지출 증가율이 둔화되는 동안, 인텔은 주주 환원 압박 속에서 R&D 효율성을 잃어갔다.14 인텔이 자사주 매입으로 EPS를 관리하는 동안, TSMC는 애플과 같은 고객사의 요구에 맞춰 최첨단 EUV(극자외선) 장비 도입에 공격적으로 투자했고, 결국 7나노, 5나노, 3나노 공정에서의 기술 리더십은 대만으로 넘어갔다.

2021년 팻 겔싱어 CEO 복귀 이후 인텔은 파운드리 재건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선언했지만, 이미 벌어진 기술 격차와 훼손된 재무 건전성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과거 자사주 매입으로 소진한 수백억 달러의 현금 유동성은 현재 인텔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투자 재원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인텔의 주가 폭락, 배당 중단, 그리고 구조조정설은 자사주 매입이 혁신을 위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키며, 기술 집약적 산업에서 한번 실기(失機)하면 회복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시사한다.16

2.4 제너럴 일렉트릭(GE): 복합기업의 해체와 금융화의 말로

GE는 잭 웰치 시대 이후 제조 기업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금융 회사(GE Capital)처럼 운영되었다. GE는 금융 부문에서 창출한 이익으로 제조 부문의 저조한 수익성을 가리고, 이를 통해 공격적인 자사주 매입을 감행하여 주가를 관리하는 모델의 원조였다. 2015년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GE Capital 매각 자금 중 약 500억 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쓰겠다고 발표했다.18

그러나 이러한 금융 공학적 접근은 제조업 본연의 경쟁력 저하를 감추는 수단에 불과했다. 전력(Power), 항공(Aviation) 등 핵심 제조 부문의 혁신은 정체되었고, 부실한 자산과 과도한 부채는 결국 GE라는 거대 기업의 해체(3분할: 항공우주, 헬스케어, 에너지)로 이어졌다. 자사주 매입은 쇠락해가는 제국의 수명을 연명하는 산소호흡기였을 뿐, 회생의 치료제는 아니었다. 2000년부터 2018년 사이 GE 주가는 80% 하락했으며, 이는 금융화된 경영 전략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9

3. 유럽의 사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균열과 사모펀드의 침투

유럽, 특히 독일은 전통적으로 주주 이익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라인강의 기적 모델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과 글로벌 자본의 압력, 그리고 사모펀드(Private Equity)의 침투로 인해 이러한 모델에도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3.1 영국: 금융화의 선도적 수용과 제조업의 쇠퇴

영국은 미국과 유사한 주주 중심 자본주의 모델을 일찍이 받아들였다. 대처 행정부 이후 금융 산업 육성과 제조업 경시 정책이 맞물리면서 제조업 비중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최근 FTSE 100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쉘(Shell), BP, 유니레버 등 거대 기업들이 주주 환원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20

영국 제조업의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CBI 산업 동향 조사에 따르면, 영국 제조기업들의 투자 의향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이는 단기 수익을 요구하는 금융 시장의 압력과 무관하지 않다. 브렉시트 이후의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들은 장기 설비 투자보다는 현금 보유나 자사주 매입을 통한 주가 방어를 선호하게 되었고, 이는 영국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R&D 투자의 정체는 영국이 첨단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22

3.2 독일: 폭스바겐과 BASF의 딜레마

독일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R&D 투자와 고용 안정을 중시해왔으나,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다.

폭스바겐(Volkswagen)의 고뇌: 폭스바겐은 전기차(EV) 전환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막대한 R&D 및 설비 투자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가 저평가에 불만을 품은 투자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배당과 자사주 매입 요구에 직면해 있다. 최근의 경영진 교체와 구조조정 논의는 기술 전환 비용과 주주 환원 요구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국 시장에서의 점유율 하락과 테슬라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상황에서도 주가 관리를 위한 자원 배분 압박은 혁신 동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25

BASF의 탈산업화 신호: 세계 최대 화학기업인 BASF는 에너지 위기와 독일 내 생산 경쟁력 약화라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 최근 30억 유로 규모의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27 공장을 폐쇄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와중에 자사주를 매입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감원 후 분배’ 모델의 독일식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녹색 화학 전환을 위한 R&D 투자가 절실한 시기에 자금이 주주에게 유출되는 것은 장기적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미텔슈탄트(Mittelstand)의 금융화: 독일 경제의 허리인 강소기업(미텔슈탄트)들이 상속 문제나 자본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모펀드(PE)의 타겟이 되고 있다. 사모펀드는 일반적으로 인수한 기업의 부채를 늘리고, 단기간에 비용을 절감(주로 인력 감축과 R&D 축소)하여 기업 가치를 높인 뒤 되파는 전략을 취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모펀드에 인수된 독일 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성이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인 R&D 투자와 특허 출원 등 혁신 지표는 둔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기술 축적이 생명인 독일 제조업의 장기 경쟁력을 훼손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29

4. 일본의 사례: 기업 거버넌스 개혁의 역설

일본은 오랫동안 기업들이 과도한 현금을 보유하고 주주 환원에 인색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아베노믹스 이후 도입된 **기업지배구조 코드(Corporate Governance Code)**와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러한 관행을 타파하고 자본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4.1 ‘PBR 1배’ 정책과 자사주 매입 붐

2023년 도쿄증권거래소(TSE)는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 미만 기업들에게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요구하며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은 2023년 약 9조 6천억 엔, 2024년에는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며 폭증했다.32 혼다, 닛산, 캐논 등 대표 제조 기업들이 조 단위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자본 효율성이 개선되고 증시가 활황을 보이는 등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산업적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다.

4.2 도시바(Toshiba): 행동주의 펀드의 희생양

도시바는 회계 부정 스캔들 이후 경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17년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에피시모, 엘리엇 등 다수의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로 들어왔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사주 매입과 고배당을 요구했고, 도시바 경영진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핵심 사업부문인 의료기기(캐논에 매각)와 낸드플래시(도시바 메모리, 현 키옥시아)를 매각해야 했다. 결국 도시바는 혁신 동력을 상실하고 2023년 상장 폐지되어 사모펀드 JIP의 손에 넘어갔다. 이는 주주 행동주의와 단기적 자사주 매입 요구가 어떻게 기술 대기업을 해체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35

4.3 도요타(Toyota): ‘낭비된 투자’ 논란과 자사주 매입

도요타는 전기차(EV) 전환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며 ‘멀티 패스웨이’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도요타 경영진은 급격한 EV 전환 투자가 “낭비된 투자(Wasted Investment)“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37 그러나 도요타 역시 막대한 자사주 매입을 지속해왔으며, 이는 ROE를 10%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비판론자들은 테슬라나 BYD가 순이익의 대부분을 설비 증설과 R&D에 재투자하는 반면, 도요타가 주가 방어를 위해 막대한 현금을 소진하는 것은 미래 경쟁력을 갉아먹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배터리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R&D에 더 공격적으로 투입되었어야 할 자금이 주주 환원으로 유출되었다는 것이다.38

4.4 R&D와의 상충 관계

일본의 거버넌스 개혁은 ’자본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 제조업 특유의 장기적 안목과 R&D 중심 경영을 위협하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사주 매입 규모가 일본 GDP의 약 3%에 달하는 수준으로 급증하면서, 이것이 설비 투자와 임금 인상을 구축(Crowding Out)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39

5. 한국의 사례: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밸류업의 딜레마

한국은 재벌 중심의 지배구조와 낮은 주주 환원율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겪어왔다. 이에 정부는 일본을 벤치마킹하여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 기업들에게 주주 환원 확대를 주문하고 있다.

5.1 삼성전자: 반도체 위기와 자사주 매입의 충돌

삼성전자는 한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글로벌 반도체 리더이다. 그러나 최근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주고, 파운드리에서는 TSMC와의 격차가 벌어지며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주가가 ’5만 전자’로 추락하자 삼성전자는 2024년 11월, 주가 방어를 위해 10조 원 규모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다.40

문제는 이 자금이 파운드리와 차세대 메모리 공정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설비 투자(CAPEX)를 축소하는 와중에 집행되었다는 점이다. 여러 보도와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수주 부진과 수익성 악화로 2025년 설비 투자를 전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42 경쟁자인 TSMC가 매년 400억 달러 이상의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며 2나노 공정을 선점하려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R&D와 설비 투자 대신 자사주 매입에 10조 원이라는 막대한 현금을 배분하는 것은 미래 경쟁력을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44 이는 미국의 인텔이 겪었던 ’재무적 성공, 기술적 실패’의 경로를 답습할 우려를 낳고 있다.

5.2 재벌 구조와 자사주 매입의 이중성

한국의 재벌 체제에서 자사주 매입은 주주 가치 제고뿐만 아니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자사주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우호 세력에게 매각하거나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소위 ’자사주의 마법’을 통해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쓰였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자사주 소각을 유도하고 있지만, 대주주들은 높은 상속세 부담 등으로 주가 상승을 마냥 반기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도 존재한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자칫 기업들이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당장의 주가 부양에 매몰되게 만들어 제조업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45

6. 중국과 홍콩: 국가 주도 자본주의와 시장 안정화 도구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특성상 자사주 매입도 국가의 정책 도구로 활용된다. 서구와 달리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특징이다.

6.1 ’국가대표팀’의 개입과 국유기업(SOE)의 딜레마

2024년 중국 증시가 부동산 위기와 경기 침체로 폭락하자, 중국 정부는 ’국가대표팀(National Team)’이라 불리는 국부펀드와 공공 기관을 동원해 시장에 개입했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와 인민은행은 상장기업, 특히 국유기업(SOE)들에게 자사주 매입을 강력히 주문했고, 이를 위해 ‘자사주 매입 특별 대출(Swap Facility)’ 프로그램까지 도입했다.46 이는 주주 가치 제고보다는 ’시스템 리스크 방지’와 ’시장 심리 안정’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진핑 정부는 ’신질 생산력(New Quality Productive Forces)’을 강조하며 국유기업들에게 향후 5년간 3조 위안(약 570조 원) 이상의 대규모 설비 교체와 기술 고도화를 요구하고 있다.48 국유기업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사주도 매입해야 하고, 공장 설비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자원 배분의 압박은 국유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악화시키거나, 비효율적인 투자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중국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어 미국처럼 경영진의 사익 추구를 위해 회사를 껍데기로 만드는 식의 자사주 매입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50

6.2 홍콩: 알리바바와 텐센트의 방어전

빅테크 규제로 성장이 둔화된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홍콩 증시에서 기록적인 자사주 매입을 진행 중이다. 텐센트는 2024년에만 1,000억 홍콩달러(약 18조 원) 이상의 자사주 매입을 약속했고, 알리바바 역시 수백억 달러 규모의 매입을 진행했다.51

이는 투자가 아닌 주주 환원을 통해 폭락한 주가를 방어하고 시장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중국 빅테크 기업들의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성숙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이 막대한 자금이 AI나 클라우드 등 신기술 개발에 전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주가 방어에 소진되는 것은 중국 테크 산업의 장기적 혁신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홍콩 증시는 2024년 자사주 매입 규모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방어적 금융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53

7. 심층 분석 및 비교: 자사주 매입이 제조업을 파괴하는 메커니즘

각국의 사례를 종합해볼 때, 자사주 매입이 제조업 붕괴를 초래하는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유형화된다.

7.1 구축 효과 (Crowding Out)의 보편성

미국, 한국, 유럽 모두에서 자사주 매입은 R&D 및 설비 투자를 구축(Crowding Out)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업의 가용 현금은 한정되어 있으며, 자사주 매입에 쓰인 1달러는 투자에 쓰이지 못한 1달러다. 특히 반도체(인텔, 삼성), 항공(보잉), 자동차(폭스바겐)와 같이 막대한 선행 투자가 필요한 장치 산업에서 수조 원의 현금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삼성전자의 10조 원 자사주 매입과 파운드리 투자 축소의 동시 발생은 이 구축 효과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7.2 경영진의 유인 구조와 단기주의 (Short-termism)

미국과 영국, 그리고 점차 독일과 일본에서도 경영진의 보상이 주가(스톡옵션, 주식 보상)와 연동되면서 단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R&D 투자는 성과가 나오기까지 5~10년이 걸리고 실패 확률도 높지만, 자사주 매입은 즉각적으로 EPS를 높이고 주가를 부양한다.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인 경영진은 장기적 혁신보다 당장의 자사주 매입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기업을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느린 자살’과 같다. 독일 미텔슈탄트가 사모펀드에 인수된 후 겪는 변화나, 미국 보잉 사태는 이 메커니즘의 전형이다.

7.3 국가별 차이: 시장 주도 vs 국가 주도

  • 미국/영국: 시장 주도형 금융화가 극에 달해 제조업 기반이 붕괴 수준에 이름.
  • 독일/일본: 이해관계자 모델이 버티고 있었으나, 글로벌 자본의 압력과 거버넌스 개혁으로 인해 빠르게 미국식을 닮아가며 과도기에 진입함.
  • 한국: 재벌 구조와 정부의 밸류업 정책이 충돌하며, 삼성전자와 같은 핵심 기업이 샌드위치 신세가 됨.
  • 중국: 국가가 자사주 매입을 통제하고 지시하며, 이를 시장 안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 투자와 환원이라는 모순된 목표를 국가 권력으로 강제 조정하고 있음.
구분미국 (보잉, 인텔)한국 (삼성전자)일본 (도시바, 도요타)중국 (국유기업)
자사주 매입 동기경영진 보상 극대화, EPS 관리주가 방어, 상속/지배력 이슈, 밸류업PBR 1배 정책, 행동주의 방어시장 안정화(국가 지시), 국유자산 가치 제고
R&D와의 관계심각한 구축 효과 (투자보다 환원 우선)충돌 발생 (투자 축소와 환원 병행)긴장 관계 (효율성 vs 장기 투자)이중 부담 (투자도 하고 환원도 하라)
제조업 영향기술 리더십 상실, 안전 사고, 몰락파운드리 등 미래 경쟁력 약화 우려사업부 매각, 혁신 지체 논란재무 건전성 압박, 자원 배분 왜곡

8. 결론 및 제언

자사주 매입은 본래 기업의 잉여 현금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수단으로 고안되었으나, 현재는 글로벌 제조업의 근간을 흔드는 금융 무기로 변질되었다.

첫째, 미국의 실패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보잉과 인텔의 몰락은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도그마에 빠져 기술적 리더십을 스스로 헌납했을 때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금융 논리가 산업 논리를 압도하면 제조업은 생존할 수 없다.

둘째, ’밸류업’과 ’거버넌스 개혁’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주주 환원 정책은 코리아/재팬 디스카운트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삼성전자나 도요타와 같이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기술 기업들에게 무리한 현금 유출을 강요하는 것은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

셋째, ‘보유 후 재투자’ 모델의 현대적 복원이 시급하다. 기업이 이익을 사내에 유보하여 R&D, 설비, 인적 자원에 재투자할 때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정책적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경영진 보상 체계를 단순 주가 연동이 아닌, 장기적인 기술 개발 성과나 안전 지표, ESG 목표와 연동되도록 개편해야 한다.

제조업은 금융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안보이자, 혁신의 원천이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반이다. 지금은 자사주 매입이라는 달콤한 독배를 멈추고, 다시 공장과 연구소로 자본을 돌려보내야 할 결정적인 시점(Critical Junctur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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